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31년 화교배척폭동 (문단 편집) === [[음모론]] 논쟁 ===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? 일부에선 이것이 일본의 사주라는 주장과 일본의 책임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. >『우리가 체험한 것으로 몇 가지 활례를 들어보겠다. 그 하나는 만주의 만보산 사건이며, 그 둘은 동경 대진재 사건인데, 그것은 모두가 터무니없는 일종의 낭설을 전포시킴으로써, 한․중이나 한․일 간에 정략적인 유혈극을 연출케 한 일본군벌의 조작극이었다.』[* 사설, 「사상 선전전을 적극 경계하라」, 동아일보, 1954.12.1. 김준현, 한국의 문학/지식 장에서 ‘만보산 사건’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, 한국문학연구 51, 2016.8, 56에서 재인용] >『동포의 수난 원인은 간단한 것이었다. 일본제국주의자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친일분자를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. (중략) 망국근성의 소유자인 매족도배가 일정의 앞잡이로 가서 가위 경쟁적으로 중국인의 권익을 침해하였었다. 이것이 저 유명한 만주사변의 서곡이었던 만보산 사건의 준비공작이었다.』[* 김우평, 「만보산 사건 전의 만주출장」, 동아일보, 1955.5.15, 김준현, 한국의 문학/지식 장에서 ‘만보산 사건’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, 한국문학연구 51, 2016.8, 56에서 재인용]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.[* 윤해동, “만보산 사건”과 동아시아 “기억의 터” -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-,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, SAI Vol.14, 2013. 486~488, 492~497 참고]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비판받고 있다. 예로 일본 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가설에 반박이 있다. [[이사하라 간지]]를 중심으로 관동군 참모부군에서는 '만몽영유계획'의 골격을 이미 1931년 6월에 갖춘 상태였다. 그렇기 때문에 만보산 충돌 음모 → 만주사변 이라는 음모론적인 가설은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이 부족한 비약이란 지적이다. 그렇기 때문에 손승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했다. >__이시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한 관동군 참모부의 '만몽영유계획'은 1931년 6월 골격이 이미 갖춰져 있었고 만주국 1년 예산안도 관동군에 의해 이미 완비된 상황이었다.__ 이러한 정황에서 본다면 만주사변의 주동적 원인을 만보산사건과 같은 우연적 사건에 찾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.[* 손승회,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- 萬寶山事件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, 역사학보 202, 2009.6, 401의 주석 40번] >__상호 인과관계의 정합성을 밝히지 못한 채 논리적 비약으로 귀결된다면 만주사변의 원인(遠因) 혹은 근인(近因)으로서의 만보산사건은 성립하기 곤란할 것이다__. 그럴 경우 만보산사건과 같은 충돌은 당시 만주에서의 일상적 사건이 우연히 확대된 것에 불과하고 만주사변의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.[* 손승회,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- 萬寶山事件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, 역사학보 202, 2009.6, 401] 그 밖의 사건의 원인을 음모론으로 보는 것에도 비판이나 반대 의견이 있다. >『화교배격사건의 원인을 일단 한국인의 화교배척감정(華僑排斥感情)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.…민족성 문제는 韓·中間을 이간질 시키려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것이고,이는 과거 개화파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중국인 멸시관의 연장선에 불과하다. 이 민족성 문제가 화교배격사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으나,직접적인 관련은 없기 때문』[* 석사학위논문, 김희용,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, 2009, 3쪽] >『이러한 일본의 책동설은 당시에도 제기되었다. 물론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그것이 다 사실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일본의 대륙 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이 각본처럼 연결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책동설의 근거가 부족하고 만보산 사건에서 만주사변 에 이르는 연쇄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.』[* 정병욱, 신설리 패,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-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, 역사비평 , 2012.11, 340] >『일본의 책임은 확인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‘사주’ 혹은 ‘음모’를 사건의 주된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? 더 나아가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항일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고 하거나, 오보를 양산하고 식민지조선인을 사주하여 눈엣가시인 화교를 축출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서 배화폭동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? 설사 그렇다고 더라도 1931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화교학살 폭동에 대해 한국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역사적 책임감과 그에 따른 엄중한 반성의 당위성까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.』[* 손승회,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, 중국근현대사연구 41, 2009.3, 163] 오히려 지구사로 따지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나는 사태였다. 딱히 '제국의 인위적인 음모'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. >『1927년의 배화폭동을 계기로 인적 교류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면서, 특히 중국노동자에 대한 단속문제가 한중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. 이미 일본에서는 조선에 한 발 앞서,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경쟁, 관동대지진 때의 중국인 학살이 발생했다. 이 과정은 넒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학살과 1903년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금지령의 전개와 흡사하다. 즉, 공업화 정도에 따라 해외노동력이 유입될, 그리고 그를 흡수할 수요가 발생하기까지의 시간이 틀리기 때문에, 시차를 두면서 유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. 그 시기가 미국의 경우 19세기 중․후반이었다면, 일본은 제1차 대전 호황기의 1910년대로 볼 수 있다. 외국노동자가 자국사회에 충격을 줄만한 규모로 유입되면, 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논리와는 별도로 사회갈등이 발생하게 된다. 조선의 경우 그 시기는 1930년대였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단초가 나타나고 있었다』[* 강진아,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, 중국근현대사연구 59, 2013.9, 112] 김준현은 >『__‘만보산 사태’를 획책한 배후로 일본을 지목한 상태에서는, 다른 갈등주체들의 능동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성도 내재해 있다.__』 는 점을 지적했다.[* 김준현, 한국의 문학/지식 장에서 ‘만보산 사건’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, 한국문학연구 51, 2016.8, 57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